최근 현대사회에서는 기교를 최소화하고 절제된 것을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이 확산되며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인테리어, 패션, 건축, 심지어는 ‘단순하게 살기’를 추구하는 삶의 철학에까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미니멀리즘 운동이 일어났던 1960년대 당시에는 비평가들로부터 고급 모더니즘의 업적과는 대립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고, 추상표현주의[1]의 낭만성, 풍요로움, 자기 찬미에 대한 반항으로 비추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재조명을 더욱 흥미롭게 만듭니다.
이 글에서는 서구 미술에서 ‘미니멀리즘’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의미, 특징, 그리고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들을 짚어보고 한국미술의 ‘미니멀리즘’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술하려 합니다. 아울러, 오늘날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살펴보며 글을 마무리할 것입니다.
미니멀리즘의 의미
'최소한의' 라는 의미의 미니멀(minimal)과 주의(ism)를 결합한 ‘미니멀리즘’은 2차 세계대전 후 1960-1970년대에 일어난 미술 운동으로, 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한 움직임입니다. 이는 기교를 최소화하여 사물의 기본을 표현할 때, 대상의 고유한 성질 즉 본질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 기본 전제입니다. 미술에서 시작된 미니멀리즘은 이후 건축, 음악, 패션, 철학 등 인접한 분야까지 확산됩니다.
Donald Judd, <Untitled>, Steel, 1969
서구의 미술 운동, 미니멀리즘은?
1) 특징 1960년대 초, 미니멀리즘이 정착하기까지 ‘ABC아트’, ‘거부미술(Rejective art)’, ‘즉물주의(Literalism), 등 많은 이름이 고안되었지만, 결국 ‘미니멀리즘’ 혹은 ‘미니멀 아트’ 라는 용어로 낙착이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미술과 일상에서의 미니멀리즘에 차이를 두기 위해 ‘미니멀 아트’라는 용어를 사용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미니멀 아트’의 특징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사물 자체의 본질을 드러내고자 미술가의 감정과 사상의 개입을 최소화했습니다. 추상표현주의에서 강조했던 미술가의 내면과 감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재료 자체의 성질을 전면에 드러내 절제의 미학을 극대화했습니다.
둘째, 똑같은 색과 모양을 가진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형태의 재료들을 반복하여 나열하거나 쌓아 올렸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3차원의 입체 작품들에서 잘 드러나는데, 여기서 하나의 단위가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아래와 같이 건조하고 무감정한 재료인 황동 상자나 흑색의 입방체를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한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연속적인 수직, 수평선들은 경직된 느낌을 자아내며 감상자의 감정이입을 차단합니다.
좌) Donald Judd, <Untitled (Six boxes)>, 각 101.6(h) x 736.6(w) x 101.6(d)cm, 1974 우) Donald Judd, <Untitled>, 각 120(h) x 313(w) x 318(d)cm, 1966~1968
마지막으로, 미니멀 아트는 미술가의 감정만 배제한 것이 아니라, 손길까지도 최소화했습니다. 미니멀리즘의 선구자 솔 르윗은 “미술가는 아이디어만 낼 뿐” 이라는 말을 남기며 거의 모든 작업과정을 조수들에게 맡기곤 했습니다. 손길에서 묻어나는 개성까지도 차단한 것입니다.
2) 미니멀리즘의 선구자 미니멀리즘은 3차원 작품들로 표현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도날드 저드[Donald Judd], 솔 르윗[Sol Lewitt],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 등이 있습니다. 도날드 저드는 미니멀리즘의 창시자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그 어떠한 비유와 상징 없이 상자 모양의 단순한 조각들을 규칙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작품의 제목도 ‘무제’로 붙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는데, 오로지 표면의 질감, 재료, 색상 등의 성질 차이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좌) Donald Judd, <Large Stack>, Steel, 1968 우) Donald Judd, <Untitled>, Steel, 1965
솔 르윗은 ‘반복’의 문제에 관심을 쏟으며 기하학, 수학의 원리까지 동원해 철저히 계산된 미니멀리즘을 선보였습니다. 미술가는 그저 질서를 만들어낼 뿐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는 공산품을 재료로 활용했고, 조형의 최소 단위인 점, 선, 면을 가진 입방체 구조물을 사용했습니다. 연속적으로 쌓아 올린 구조물은 마치 인간의 냉철하고 이성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듯합니다.
좌) Sol Lewitt, <Corner Piece #4>, white painted wood, 110.4(h) x 110.4(w) x 110.4(d)cm, 1976 우) Sol Lewitt, <Modular Cube/Base>, Baked enamel on steel, 43(h) x 128(w) x 128(d)cm, 1967
이후, 미니멀리즘은 미술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용어로서도 자리를 잡아가게 됩니다. 예를 들어 1980-1990년대에 미니멀리즘은 패션 분야로 확산되었는데, 솔 르윗의 블랙&화이트 입방체를 표방하듯 모노톤의 패션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렇게 미니멀리즘이 일상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지적이고 도시적인 이미지는 점점 굳어졌습니다.
3) 미니멀리즘의 배경과 영향 미니멀리즘의 영향으로 미술의 지위를 부여받게 된 개념이 있는데, 이는 ‘모노크롬(monochrome)’, ‘레디메이드(Ready made) 등. 주된 흐름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해체하는 계기가 되어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노크롬은 다색화(polychrome)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단일한 색조를 명도와 채도에만 변화를 주어 그린 단색화를 의미합니다. 나아가, 색뿐만 아니라 주제, 내용, 형태를 거부한 모노크롬은 ‘형상-의미’ 기반의 구성을 추구하던 전통미술에 대한 반발로 보며, 3차원으로만 구현되었던 미니멀리즘이 차츰 평면회화로 확대된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1960년대에는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라는 미국 화가가 등장하는데, 도날드 저드와 이런 대화를 나눈 기록이 있습니다. [2] “내 회화는 오직 거기에서 볼 수 있는 것만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당신이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의 전부이다”. 이후 스텔라의 회화에는 의도적인 무표정성이 더욱 두드러졌고, 규칙적이고 패턴화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Frank Stella <Tomlinson Court Park I> oil on canvas, 220 x 280 cm, 1954
또한, 그는 작품의 전체적인 형태가 내부의 무표정성과 일치하도록 캔버스 형태 마저 변형하기도 했습니다. 스텔라는 회화의 가장 근본으로 돌아가 작업했던 진정한 미니멀리스트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Frank Stella <Más o menosI> oil on canvas, 300 x 418 cm, 1964
이렇게 살펴본 미니멀리즘은 비개성적이고 관습적이지만, 휴머니즘 미술과 상반되는 예술영역을 확장시켰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동양 미술에도 미니멀리즘이 존재할까?
1)단색화 대표적으로 우리는 ‘단색화’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한 가지 색 또는 비슷한 톤의 색만을 사용한 그림으로 한국의 전통과 미학을 담은 것입니다. 이 역시 장식적 요소와 구체적 형상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서양의 미니멀리즘, 모노크롬과 같은 맥락일까요? 한국의 단색화는 서양의 미니멀 아트의 영향을 받으며 1970년대 초반에 태동한 것은 맞지만, 시각만이 아닌 질감을 드러내거나 자연성을 나타내는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습니다. 형식적인 측면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는데, 서양의 미니멀리즘은 감정, 생각, 사상 등을 ‘비워낸 회화’를 보여주었다면, 한국의 단색화는 우리의 고유한 정서와 정신성을 담아냈습니다. 즉, 객관화되고 개체화된 서양의 모노크롬과 달리 한국의 단색화는 풍부한 감정이입과 물아일체를 경험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반복, 패턴화된 ‘점’들은 르윗의 수학적 ‘반복’과 어떻게 다를까요?
이우환 <점으로부터> 캔버스에 안료, 161.9 x 130.2cm, 1978 ⓒ Sotherby's
이 점들을 그리면서 화가는 요동하지 않는 일관된 경지, 정신적 초월을 기도하며 점 하나하나에 기운을 실었습니다. 즉, 외형적인 측면에서는 미니멀리즘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만, 사실은 기성품들을 무감정하게 나열했던 서양의 미니멀리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1970년대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침묵의 저항'이라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고 시기적으로도 맞물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단색화는 서구의 미니멀리즘에 정확히 대응되지는 않습니다.
2)여백의 미 특정 시기의 미술 운동이나 사조는 아니지만 동양의 미니멀리즘이라고 일컬어지는 요소가 있는데, 이는 바로 ‘여백의 미’ 입니다. 이는 눈에 보이는 형태보다 보이지 않는 여백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여 정신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즉, 그려지는 형상은 여백을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예를 들어 산수, 사람, 집을 최소한의 형태로 표현해 여백을 남기는데, 그것은 광활한 자연의 기운을 담아내고자 함입니다. 형상은 비워내지만 우리의 내면은 풍성해지는 역설은 ‘비움’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일상의 미니멀리즘
1)라이프스타일
쏟아지는 무분별한 정보들과 다원화된 사회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미니멀한 삶의 방식을 추구합니다. 단순하고 심플한 형태, 즉 ‘절제미’를 선호하는 현상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줄어들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Limited edition’, ‘NEW’라는 글자만 보아도 고개를 돌리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죠.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무엇일까요?
2) ‘응축’의 미학
정보의 홍수와 과잉 공급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간편하고 스마트한 것을 추구합니다. 즉, 라이프에서 말하는 미니멀리즘은 단순한 최소주의가 아니라, 양보다는 삶의 질을 중시하며 작지만(compact) 집약적, 함축적, 효율적인 것을 선호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비움의 미학’이 여기서는 ‘덜어내지만 내실은 강화된다’ 라는 말로 적용될 수 있는데, ‘일체형’(ALL-IN-ONE), 원스톱 서비스(One stop service, 한 장소에서 관련한 업무를 일괄하여 처리하는 방식), 다기능(Multi-function), 예술품과 인테리어의 구분점 해소 등의 생활 용어로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즉, 핵심들을 압축하는 우리의 생활방식이 현대인들의 미니멀리즘 라이프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3) 인테리어의 요소가 되는 미술작품
오늘날에도 1960년대의 미니멀리즘 정신을 이어받아 군더더기 없이 점, 선, 면의 조형요소로만 구성된 작품, 기하학적인 작품, 여백의 미가 두드러진 작품 등이 선호됩니다. 예를 들어 최승윤, 채효진, 김보민, 박상희, 이다희 작가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오늘날의 미니멀 라이프를 시각화한 듯 심플하지만 조형적으로 지루하지 않습니다. 화면에 담긴 함축의 수수께끼를 풀며 일상에 활기를 더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전체 참고자료 : <미니멀리즘> 데이비드 베츨러 저 / 정무정 역 / 열화당, [네이버지식백과]
[1] 추상표현주의는 일반적으로 1940년대와 1950년대 미국 화단을 지배하던, 미국 회화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회화의 한 양식을 가리킨다. 본래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는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1866~1944)의 초기 작품에 대해서 사용했던 말로, 미국의 평론가 바Alfred Barr가 1929년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의 유동적인 초기 작품에 대해서,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이라는 의미에서 추상표현주의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이후에 미국의 젊은 작가들, 특히 폴록Jackson Pollock(1912~1956)과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의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일반화되었다. [2] <미니멀리즘>, 데이비드 베츨러 저/ 정무정 역/ 열화당에서 대화 기록 인용